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본문: 마태복음 12:9–14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는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상태였는지,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알려 줍니다.
그의 한쪽 손이 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람을 보면서 그의 고통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겉으로는 성경적인 질문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바르게 지키려는 질문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 질문 뒤에 숨어 있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들은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 있었지만 그 사람을 도울 생각보다, 그 사람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사람을 바라보면서도 예수님의 시선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안식일에 그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붙잡아 끌어올리지 않겠느냐?”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은 바로 앞의 안식일 논쟁과 연결됩니다.
바리새인들은 계속해서 묻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허용되는가?”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었을 때도 그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손 마른 사람 앞에서도 다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허용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질문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무엇까지 해도 되는가?”에서 “무엇이 선한가?”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신앙은 단지 금지선을 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인가?”
“이 정도는 해도 되는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이런 질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언제나 그 질문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최소한으로 지키는 방법만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적극적인 질문을 주십니다.
“오늘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는 추상적인 원칙이 아니라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한쪽 손이 마른 한 사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 사람의 가치는 손이 온전한가 아닌가에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생산적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손이 회복되기 전부터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은 다른 손과 같이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선언이 이제 실제 행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말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긍휼은 고통받는 사람을 향했고, 회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장면은 앞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그 다음 말씀도 생각하게 합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일은 고통받는 사람을 그대로 두는 일이 아니라 그를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깨어진 것이 회복되고, 고통받는 사람이 긍휼을 입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안식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모든 사람이 그 회복을 기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손 마른 사람이 회복되자 바리새인들은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 것인지 의논했습니다.
여기에 이 단락의 가장 날카로운 대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복시키셨고, 그들은 파괴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에게 생명을 회복시키셨고,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계획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안식일의 주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서도 내 생각을 말씀보다 더 붙들 수 있습니다. 신앙의 원칙을 지킨다고 하면서 눈앞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중요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종교적 지식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논쟁의 재료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고통받는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발할 수 있을까?” 생각할 때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우리 주변에도 그런 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조용히 힘들어하는 사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
실수가 많은 사람,
믿음이 약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아이,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사람.
우리는 그 사람을 문제로 볼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우리는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열매입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제자도가 그다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이 조금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디까지 해야 합니까?”만 묻지 않고,
“오늘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하면서 멀리 있는 거대한 일을 먼저 찾기보다, 하나님께서 오늘 내 앞에 두신 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양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하나님.
한쪽 손이 마른 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예수님.
그 주님의 긍휼을 받은 우리도 오늘 누군가에게 작은 선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긍휼을 받은 사람은 긍휼을 흘려보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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