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 한 관리가 찾아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말 가운데 마음에 오래 남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딸은 죽었습니다.
현실은 이미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죽음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예수님보다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들으시고 일어나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딸이 있는 집으로 가시는 길에 또 한 사람을 만나십니다.
12년 동안 고통받던 한 여인
한 여인이 12년 동안 계속되는 출혈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12년.
잠깐 지나가는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날을 낫기를 기다렸을까요. 얼마나 여러 번 이제는 괜찮아지겠지 기대했다가 다시 절망했을까요.
게다가 레위기 15장의 정결 규례를 생각하면 그녀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지속적인 출혈은 의식적 부정의 상태와 연결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특별한 죄를 지었다는 의미가 아니지만, 오랜 질병은 그녀의 일상과 공동체 생활에도 큰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분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나을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돌아보셨습니다.
이 장면이 참 좋습니다.
여인은 뒤에서 조용히 손만 대고 사라지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익명의 환자로 그냥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아보셨습니다.
그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사람들에게 그녀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병명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딸아.”
12년 동안 그녀의 삶을 설명하던 것은 질병이었지만, 예수님 앞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질병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힘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
이 이야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 여인처럼 강하게 믿으면 병이 낫는다.”
본문을 이런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백부장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관리는 말했습니다.
“제 딸에게 손을 얹어 주십시오.”
혈루증 여인은 생각했습니다.
“옷만 만져도 나을 것이다.”
믿음이 표현되는 방식은 모두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본 분은 같았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믿음은 그 자체로 기적을 만들어 내는 힘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드는 빈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내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보다 먼저 **“내 믿음이 누구를 붙들고 있는가?”**입니다.
부정함이 예수님을 더럽히지 못했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는 앞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과도 연결됩니다.
나병환자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 나병환자가 깨끗해졌습니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입니다.
의식적으로 부정한 상태에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부정함이 예수님께 옮겨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온전함이 그녀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죽은 소녀가 있는 집으로 가십니다.
나병.
출혈.
죽음.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들이 계속 예수님 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들에 삼켜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서 깨끗함과 치유와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장례가 시작된 집에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관리의 집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미 피리를 부는 사람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애곡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미 장례가 시작된 집입니다.
그런데 이제 한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상황이 먼저 바뀐 것이 아닙니다.
죽은 아이가 먼저 살아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죽음의 상황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 자체가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소녀는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죽음의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자기들 앞에 서 계신 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씀은 소녀가 단순히 기절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녀를 곧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권세 앞에서 그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죽음은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님께는 깨울 수 있는 잠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신 후 예수님께서는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구약의 정결 규례에서는 죽은 몸에 접촉하는 것이 의식적 부정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방향이 뒤집힙니다.
죽음이 예수님을 더럽히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마태는 이 엄청난 사건을 놀랄 만큼 짧게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기적의 화려함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이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신가?”
마태복음 8–9장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계속 예수님의 권세를 보았습니다.
질병 앞에서의 권세.
광풍과 바다를 다스리는 권세.
귀신을 명령하는 권세.
죄를 용서하는 권세.
그리고 이제 죽음에 대한 권세입니다.
마태는 계속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신가?”
그분은 오래된 질병보다 크십니다.
부정함보다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죽음보다 강하십니다.
그래서 소녀가 일어나자 그 소문이 온 지역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소문을 듣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기적에 놀라는 것과 그 기적이 가리키는 분을 따르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기적은 표지입니다.
표지가 가리키는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녀의 소생은 마지막 부활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이 땅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앞으로 일어날 더 큰 일을 바라보게 합니다.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 예수님께서 훗날 친히 죽음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약속은 “믿음이 강하면 모든 질병이 지금 반드시 낫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반드시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더 크고 확실한 소망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에게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처음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제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그러나” 앞에 오래 머물게 됩니다.
질병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절망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죽음도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보다 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죽음이 마지막 문장처럼 보이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아직 문장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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