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다시 건너와 자기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예수님께 걸어올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들어 예수님께 데려와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분명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을 고쳐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아들아, 안심하라. 네 죄가 용서받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더 깊은 문제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보셨습니다.
죄의 문제였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의 중풍이 그의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생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질병을 개인의 특정한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은 인간에게 육체의 고통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건강이 회복되기를 원하고,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고, 가정이 평안하기를 원하고, 막힌 길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것들을 주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을 보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편안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말씀은 “일어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였습니다.
“아들아, 안심하라”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의 순서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먼저 그 사람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아들아.”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그 다음에야 죄를 말씀하십니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예수님의 권세는 차갑지 않습니다.
그분은 죄인을 짓누르기 위해 죄를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를 궁극적으로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이 사건의 핵심 질문을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만일 예수님이 단지 한 인간이라면 그들의 판단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정말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분의 말씀은 신성모독이 아니라 구원의 선언이 됩니다.
보이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는 권세를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마음속 생각까지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네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은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면 즉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일어나면 그 말에 권세가 있는 것이고, 일어나지 못하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한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치유를 행하신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적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기적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침상이 그를 들고 왔지만 이제는 그가 침상을 들고 갑니다
이 사람의 모습을 처음과 마지막으로 비교해 보면 아름답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눕혀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가 일어나 자기 집으로 걸어갑니다.
처음에는 침상이 그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제는 그가 침상을 들고 갑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변화는 걷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미 예수님에게서 들은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아, 안심하라. 네 죄가 용서받았다.”
그는 단지 건강해진 사람으로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의 선언을 받은 사람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일어나야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장면에는 복음의 아름다운 순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먼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어나라. 걸어라. 네가 제대로 걸으면 내가 너를 받아 주겠다.”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그리고 나서:
“일어나라.”
은혜가 먼저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걸음이 뒤따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제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용서받은 사람이 그 은혜 안에서 일어나 새로운 삶을 걷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잘 걸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용서는 값싼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네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씀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죄 사함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그리스도께 값싼 것은 아니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지신 인자는 결국 십자가로 가십니다.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중풍병자에게 주어진 죄 사함의 선언은 결국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값없는 은혜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값을 치르셨습니다.
죄인을 용서하고 일으키시는 예수님
중풍병자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 무리들은 놀라움과 경외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마태복음 8장부터 예수님의 권세는 계속해서 드러났습니다.
질병이 그분께 순종했습니다.
바람과 바다가 그분께 순종했습니다.
악한 영들도 그분의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 앞에서도 예수님의 권세가 드러납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세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가?”
더 깊은 질문이 있습니다.
“내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지신 이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우리를 멀리서 정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인에게 가까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안심하라.”
“네 죄가 용서받았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복음은 죄인을 용서하고 다시 일으킵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사람에게 새로운 길을 걷게 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일으키는 힘은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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