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후 마침내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도착하셨습니다.
그곳에는 귀신 들린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덤 사이에서 살았고 너무나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가지 못하는 그 길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바로 앞에서 제자들은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고 물었습니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그런데 건너편에 도착하자 뜻밖의 존재들이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마지막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습니까?”
그들은 심판의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심판할 권세가 예수님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님에 관한 지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존재들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귀신 들린 두 사람은 너무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을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자 상황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귀신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존재들이 예수님께 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과 악한 영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 악한 영은 서로 비슷한 힘을 가진 두 세력이 아닙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허락 없이는 어디로 갈 것인지조차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간청하는 쪽은 귀신들입니다.
명령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가라”
귀신들이 길게 간청했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단 한마디였습니다.
“가라.”
복잡한 의식도 없습니다.
긴 주문도 없습니다.
힘겨운 싸움도 없습니다.
말씀 한마디입니다.
그러자 귀신들이 즉시 두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에게 들어갑니다.
온 돼지 떼가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 물에 빠져 죽습니다.
이 사건은 악의 파괴적인 성격도 보여 줍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의 삶은 이미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무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가자 그곳에서도 파괴와 죽음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사람들이 통제하지 못했던 악한 영들이 예수님의 한마디에 복종했습니다.
앞에서는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제는 악한 영들까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질병도,
자연도,
악한 영도
예수님의 권세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마을로 달려가 모든 일을 알렸습니다.
돼지 떼가 죽었다는 사실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도 전했습니다.
그러자 온 성읍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우리는 당연히 좋은 결말을 기대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우리 마을에도 들어오십시오.”
“우리와 함께 있어 주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 한 요청은 정반대였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떠나 주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결말입니까?
귀신들도 간청했고 사람들도 간청했습니다
31절에서 귀신들이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34절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둘 다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요청합니다.
귀신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를 돼지에게 보내 주십시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우리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이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충격적인 부분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원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그 예수님이 당신의 삶에 계시기를 원하는가?”
예수님이 나를 도와주시는 것은 원하지만,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은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은 원하지만,
내 계획과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바꾸시는 것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들어오지 마십시오.”
“이것만큼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쩌면 오늘 가다라 사람들이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떠나 주십시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거절했는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쉽게 이렇게 결론 내리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돼지와 돈을 사람보다 사랑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손실이 그들의 반응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의 정확한 동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만 붙잡으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경험하고도 그분을 자기들 가운데 모시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보는 것이 곧 믿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도 곧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 앞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입니다.
“떠나 주십시오”인가, “함께 있어 주십시오”인가
마태복음 8장은 예수님의 놀라운 권세를 계속 보여 주었습니다.
나병이 그분의 말씀 앞에서 물러갔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으로 치유되었습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바람과 바다가 순종했습니다.
악한 영들도 예수님의 허락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서 질문이 우리에게 넘어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가다라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떠나 주십시오.”
그러나 제자의 기도는 달라야 합니다.
“주님, 함께 있어 주십시오.”
내 계획이 바뀌더라도,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하더라도,
주님께서 내가 원하지 않았던 곳까지 만지시더라도,
“주님, 떠나지 마십시오.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도움만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능력을 원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자신을 원하는 사람입니까?
주님께 “여기서 떠나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제 안에 거하시고 제 삶을 다스려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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