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을 제대로 보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마태복음 11:7–15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 예수님은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예수님은 먼저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갔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갔느냐?”
둘 다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습니다
요한에게 질문은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의 질문 하나만 보고 그를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메시지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헤롯의 죄를 지적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한 번 흔들렸다고 해서 흔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때때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의 흔들림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모든 은혜를 지워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왕궁의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갔느냐?”
그런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왕궁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왕에게 듣기 좋은 말을 했다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편안함보다 부르심을 선택했습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의 반응도, 권력도, 편안함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선지자보다 더 큰 자”
그러자 예수님은 세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면 선지자를 보려고 갔느냐?”
이번에는 대답이 ‘그렇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왜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큰 자였을까요?
요한이 다른 선지자들보다 인격적으로 더 훌륭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더 많은 기적을 행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인용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도록 보내심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멀리서 메시아의 오심을 바라보며 “그분이 오실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 바로 앞에 서서 “그분이 오셨다”고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요한 자신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도록 부름받았는가에 있었습니다.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크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이것은 우리가 요한보다 더 거룩하거나 더 충성스럽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은 약속과 성취가 만나는 경계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았지만 아직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될 구원의 전체 모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으며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보다 더 훌륭해서 큰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은혜의 빛 아래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랑할 이유가 아니라 감사할 이유입니다.
약속에서 성취로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율법도, 제사도, 선지자들의 약속도 하나님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약속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약속과 성취가 만나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말했습니다.
“오실 것입니다.”
요한은 말했습니다.
“오셨습니다.”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구약의 엘리야가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약속된 사자이고,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엘리야라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요한은 누구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국 요한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의 시선은 요한에게 머물 수 없습니다.
그가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래서 예수님은 이 단락을 이렇게 마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사람들은 요한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의 설교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들었다고 모두가 말씀을 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많이 들었다는 것과 성경을 정말 듣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를 보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요한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러나 이야기가 끝날 때에는 오히려 우리에게 질문이 돌아옵니다.
“너희는 정말 듣고 있는가?”
요한이 누구인지 제대로 들으면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참된 사자는 자신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지 않습니다.
자신을 보내신 분을 가리킵니다.
요한의 위대함은 자신을 크게 만든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크게 보이게 한 데 있었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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