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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은 ‘대화‘다

묵상은 ‘대화’다

권연경(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타인, 타자성 그리고 대화

(나와 너:Ich und Du)를 저술한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대화의 철학자‘라 불린다. 그에 의하면 우리 삶의 본질은 ’관계’다. 그래서 우리 존재를 규정하는 근원어는 하나가 아닌 ’짝말’이다. ‘나-그것’이 그 하나이고, ‘나-너’가 또 다른 하나이다. 이 짝말은 우리가 주변의 세계와 맺은 관계의 방식을 묘사한다. 나는 주변의 이웃이나 세계를 ‘그것‘으로, 곧 내가 계산하고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때, 나는 주변의 이웃과 세계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반면 ’나-너‘의 관계에서 나는 나의 이웃과 세계를 ’너’로, 곧 내가 통제할 수 없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없는 그 자체의 인격으로 마주한다. 내 앞에 선 사람이 나의 의도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된 타인임을 알고 그 독자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나 역시 너와의 관계에 참여하는 존재, 그 관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개방된 사람으로 존재한다. 이런 관계에서 대화가 가능해진다. 

상담을 공부한 이들은 ’내담자 중심‘, 혹은 ’인간 중심’ 상담을 내세운 칼 로저스(Cal R Rogers)를 생각할 것이다. 공감은 하되 감정이입은 안된다고 생각하는 통념과 달리, 로저스는 상담자가 내담자와 열린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내담자뿐 아니라 상담자 역시 그 관계에 대해 열린 상태다. 열려 있다는 것은 관계 자체에 참여하고 그 관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상담자-내담자 이전에, 사람과 사람으로 진솔한 관계를 맺는다. 이런 진솔하고 열린 관계 속에서 내담자는 아무 두려움 없이 자기 자신을 탐색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고 이 문제를 넘어 자신을 실현하는 힘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는 발상이다.

혹은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n)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를 기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소유의 방식으로 살수도 있고, 존재의 방식으로 살 수도 있다. 길가의 아름다운 꽃을 그 자체로 두고 즐길 수도 있고, 그걸 꺾어와 내 소유로 삼을 수도 있다. 황제인 듯 황제 아닌 아우구스투스가 흥미로워 로마사를 수강할 수도 있고, 딱히 흥미는 없지만 학점 관리에 최적이라 선택할 수도 있다. 열심히 공부하는 건 비슷하지만, 로마사 자체가 내 관심사인 경우와 그냥 학점을 위한 수단에 머무는 경우는 다르다. 부버식으로 말하자면, 해당 주제와 ’나-너‘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과 그냥 ’나-그것’의 관계에 머무는 것의 차이다. 

관계에 관한 이런 통찰의 핵심은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 앞애 있는 존재는 자기 나름의 가치와 의도를 지닌 존재이다. 따라서 나의 의도나 통제에 종속될 수 없다. 이는 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남과 나 사이의 경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 타자성의 수긍에서부터 진정한 대화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이런 대화는 서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이어진다. 상대방을 내 의도에 종속시키려는 정치 행위가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만남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를 향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나누는 대화 또한 달라질 것이다. 이런 만남과 대화는 우리를 바꾼다. 내 앞의 상대나 나나 모두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하며 대화하기 때문이다. 가장 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어려운 일중 하나다. 


성경의 타자성

대화 혹은 관계에 대한 현인들의 통찰은 성경을 마주하는 우리 태도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성경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성경의 타자성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을 사랑하지만, 성경은 내 소유가 아니다. 나의 하루를 기록한 일기도, 내 생각을 기록한 비망록도 아니다. 내가 편하게 읽어도 되는 그런 책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나를 위해 기록된 것도 아니다. 성경의 모든 글은 나 아닌 누군가가 나 아닌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성경의 모든 문서는 그 나름의 저자나 편집자가 있고, 또 애초에 의도된 독자가 있다. 물론 우리는 원래 저자들이 의도한 그 독자가 아니다. 하나의 책으로서 성경과 나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문화적 거리가 있다. 그 점에서만큼은, 오래전 기록된 여느 고전과 다를 바 없다. 고전의 생경함은 성경이라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으면 말씀과 우리 사이는 그 만큼 멀어진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갑자기 인간적 차원이 사라지고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영향을 부정하는 쿠란이나 몰몬경과 달리, 교회는 하나님이 사람의 글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고백한다. 성경이 사람의 글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한다면서, 그 적나라한 소통 과정 전체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성경과 나의 거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하나님을 향한 시편 속 인간의 항변은 어떻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되는 것일까?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한 바울의 날 선 비판이나 고린도 신자들을 비꼬는 그의 신랄한 풍자가 어떻게 2천년 뒤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일까? 골치 아픈 질문은 덮어두고, 그냥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읽으면 될까? 하지만 그건 내 앞에 ’너’로 서 있는 말씀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그것‘으로 만들어 내 생각대로 요리하는 것이 아닌가? 내 앞에 놓인 말씀은 내 마음대로 재단할 수 없는 엄연한 타자라는 인식, 바로 여기서 제대로 된 관계 맺기가 시작될 것이다. 


말씀을 ’그것’으로 대하는 잘못

성경 공부를 위한 참고서인데 간혹 ‘정복‘이나 ’마스터‘같은 제목을 단 책들이 보인다. 성경을 더 잘 알고 싶은 열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불편하다. 정복의 열정은 상대방의 대상화를 전제한다. 내가 정복하고 싶은 대상은 내가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그것’일 수는 있어도, 내가 존중해야 할 ‘너‘, 그래서 서로 열린 마음으로 관계를 맺을 ’너’는 아니다. 나는 성경을 ‘정복‘하고 싶고, 그 내용을 ’마스터’하고 싶다. 나의 이런 열망은 더 깊은 이해를 향한 열정일까? 아니면 성경조차 내 것으로 삼으려는 욕망일까? 수능을 위해 참고서를 정복하듯 성경 이야기 역시 정복해야 할 무언가로 대상화하는 것,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씀 앞에 서서 그 말씀과 열린 관계로 들어가지 않고 말씀을 파악하고 나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이용하려 드는 것은 잘못이다. 

목적이 분명할수록 우리는 이런 실수에 자주 빠진다. 나는 성서학자다. 성경읽기가 나에게는 밥벌이의 일부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을수록, 그리고 성경에 관한 많은 말을 할수록 더 많은 이익이 생긴다. 이렇게 성경은 나에게 ‘그것‘으로 존재한다. 나는 성경을 읽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또 그걸 글과 강의로 만들어 유통하고 생계를 유지한다. 직업이니 필요한 일이지만, 위험 또한 분명하다. 직업 활동의 대상이 되는 만큼, 말씀을 ‘너‘로 바라보며 마주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성경을 다루는 데 능해질수록, 성경을 다루는 데만 익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능숙한 성경학자가 되어가면서 진솔한 그리스도인 되기를 잊은 사람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장 진솔한 ’나’로서 말씀의 ‘너’ 앞에 서는 시간조차 나의 필요를 위해 말씀을 이용하는 행위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설교자 역시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 늘 설교의 부담 아래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설교거리이다. 설교자인 만큼, 말씀을 읽고 거기 담긴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 그래서 부지런히 말씀을 읽는다. 그 말씀에서 멋진 메시지를 깨닫고 기뻐한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의 기쁨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다. 그런데 깎은 고구마처럼 금방 색이 변한다. 처음의 순수한 감격은 금방 오는 주일설교거리를 확보했다는 안도감이 된다. 나를 위한 말씀이던 것이 곧바로 교인들을 위한 교훈으로 모습을 바꾼다. 때로는 이 설교를 꼭 들어야 할 교인들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처럼 설교에 농이 익을수록, 나는 전문 ‘설교자’로서의 자태를 굳혀간다. 그러다 보면, 말씀 앞에 겸허히 서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렵다. 말씀을 ’그것’으로 다루는 데 숙달되면서 말씀을 ‘너’로 마주하는 법을 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말씀을 대상화하는 위험은 직업적으로 성경을 다루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일까? 누구나 겪어 알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의도를 갖고 성경에 접근하는 것은 소위 ‘프로’나 ‘아마주어’나 마찬가지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같은 위험 아래 놓여 있다. 애초에 성경을 펴서 묵상하는 행위 자체가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하나의 고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한다. 나는 지금 읽는 말씀에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겠다는 뚜렷한 의도에 이끌린다. 

매우 고상한 의도이지만, 위험하다. 내가 품은 의도는 종종 내 앞에 놓인 말씀이 나의 소유가 아닌 ‘타자’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내가 존중하며 경청해야 할 목소리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메시지의 제공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때로는 그런 메시지가 나오도록 말씀을 압박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씀을 향한 나의 사랑과 열정은 쉽게 말씀에 대한 폭력으로 변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기대’가 오히려 존중되어야 할 자녀의 인격을 침해하는 ‘폭력‘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사랑, 폭력, 우상숭배

말씀을 묵상할때마다 우리는 늘 이런 위험과 마주한다. 나는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 제대로 된 대화라면 묵상은 내 앞에 놓인 말씀을 찬찬히 읽고, 내 의도나 필요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말씀 자체의 의미를 묻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의 풍경이, 혹은 그 속에 담긴 장면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묻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하루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나는 최대한 신속하게 내 앞에 놓인 말씀에서 나를 위한 메시지를 찾고 싶다. 열심있는 사람들이 잘 걸리는 소위 ‘적용강박증’이다. 그래서 나의 묵상은 종종 말씀의 정원 자체를 차분히 음미하는 대신, 그 정원을 바삐 뒤적이며 내가 원하는 것을 찾는 보물찾기가 된다. 종종 나의 이런 열망은 내가 원하는 보물을 만들어내는 경지로 발전한다. 내가 읽은 말씀을 이리저리 굴리며 내게 맞는 메시지를 창조해낸다. 이런 움직임에 숙달되면, 어색한 느낌조차 없어진다. 말씀을 내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다는 죄책감은 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게 되었다‘는 흐뭇함이 든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나의 성경읽기는 오늘의 운세를 알아내려는 시도와 비슷하고, 성경은 나에게 점괘를 보여주는 주문 모음집이 된다. 

말씀에 대한 폭력이 이렇게 쉽게 자행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생한 육성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글은 스스로 자기 의미를 내세우지 않는다. 글로 된 말씀과의 대화는 전적으로 내 편에서의 해석에 달려 있다. 성경을 펴서 읽는 것도 나요, 거기 쓰인 내용을 해석하는 것도 나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무를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하지만 말리는 사람이 없다. 독이 오른 사춘기 아이와 달리, 말씀은 사랑을 가장한 나의 집착과 폭력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의 폭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내가 우겨서 메시지를 찾아내거나 본문을 취사선택하여 메시지를 만들어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내게 맞는 말씀을 주셨다고 감사하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건강하다고 기뻐한다.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실은 위험한 상태이다. 성경의 타자성을 무시하고, 성경을 나 자신의 욕망과 생각에 종속시키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다분히 역설적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하며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냥 내게 편리한 대로 읽고 적용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우리 고백이 실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태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공식적인 고백과 실제 성경을 다루는 자의적 태도의 결합은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는 ‘해석학적 우상숭배‘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내 마음대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강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기적 해석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설교하는 설교자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당화할 수 없는 발상을 하나님의 권위로 들이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편리하고 유리한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드는 재주는 설교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경을 마주하는 우리 모두 다 이런 ‘해석학적 우상숭배‘의 잘못에서 자유롭지 않다.

목숨처럼 사랑하는 자녀를 독자적인 인격으로 쉽지 않은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타자’임을 인정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처럼, 사랑은 쉬이 통제를 위한 명분이 된다. 물론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내가 사랑이라 우기는 욕망, 곧 상대를 ‘그것‘으로 만들어 내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끈질긴 욕망이다. 건강한 묵상은 바로 이런 대상화의 욕망을 점검하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가 말씀읽기를 ’명상‘ 혹은 ’묵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런 필요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명상은 말 그대로 ’눈 감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주변의 자극을 막으려는 것이다. 묵상은 침묵하며 생각에 잠긴다는 말이다. 명상이 밖에서 오는 잡음을 제거하려는 시도라면, 묵상은 내가 만들어내는 소음을 잠재우려는 시도다. 눈을 감든 입을 다물든, 모두 혼란스러운 정념을 차단하고 올곧은 정신으로 사유에 집중하겠다는 의도의 표현이다. 성경읽기에서는 무엇보다 말씀을 나의 ‘그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을 차단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말씀이 나의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나의 선제적 의도를 내려놓는 일, 겸허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말씀을 ’너’로 마주하는 일, 이것이 제대로 된 성경묵상의 첫 단추다. 


대화로서의 묵상

말씀의 권위에 대한 고백은 말씀의 다름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내가 좋은 대로 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성경을 저술한 인간 저자의 의도가 있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그 말씀을 통해 전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읽는다. 그런 점에서 묵상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를 닮았다. 내가 중요한 상대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해보자. 상대방이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의 말을 귀찮아하며 흘려듣거나, 대충 듣고 내 맘대로 속단하는 실수를 피할 것이다. 오히려 나는 상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차분하고 진지하게 따라가며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상대의 생각이 나와 다를수록 나의 듣기는 더 세심해질 것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자주 질문을 던지기도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상대방의 의도가 무어인지 가늠할 것이다. ‘나‘와 ’너’가 서로 열린 관계 속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열린 마음으로 말씀과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의 목적은 내가 지닌 의도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말씀과의 대화도 그렇다.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말씀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진다. 말씀과의 대화가 많아질수록 말씀과 나의 관계도 깊어진다. 말씀을 더 잘 알고, 말씀과의 관계가 깊어질 수록 그 말씀은 내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나에게 중요한 누군가가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다. 하루하루 점괘를 알아내려는 적용강박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내 삶을 지탱하고 인도하는 삶의 힘과 지혜가 된다. 

부는 악기라도 피리와 백파이프는 작동 원리가 다르다. 피리는 내 입의 바람이 곧바로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간다. 불기를 멈추면 소리도 멈춘다. 백파이프는 다르다. 내가 부는 바람이 바로 소리로 나가는 대신 바람 주머니로 가 쌓인다. 그리고 쌓여 있는 바람이 그때그때 최적의 파이프를 타고 필요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건강한 말씀묵사은 백파이프의 원리에 가깝다. 매일 말씀묵상을 통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대화를 통해 말씀의 바람 주머니를 채운다. 그리고 그 속의 바람은 내 삶의 필요에 따라 적절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히브리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독력한다(3:1).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하기도 한다(12:1,2). 말씀은 이런 깊은숙고, 진지한 바라봄을 통해 우리 삶을 인도한다. 이렇게 되려면 먼저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뚜렷한 존재로 새겨져 있어야 한다. 알지못하는 예수를 바라 보거나 생각할 수는 없다. 말씀에 대한 묵상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당장 무슨 지침을 얻자는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 그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더 잘 이해하고 그 모습을 더 깊이 숙고하는 것이다. 나는 말씀을 매개로 그리스도와 마주하며 진솔한 대화를 이어간다. 그리고 그는 구원의 소망을 향해 순례하는 나에게 시의적절한 은혜를 베풀며 나를 이끄실 것이다. 말씀묵상은 바로 이런 관계를 지탱하는 매일의 양식이다. 


매일성경 202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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