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5:18-27
어둡고 캄캄한 여호와의 날
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제사보다 정의와 공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21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25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예고된 심판
26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27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은 구원과 축복을 기대하며 여호와의 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거짓된 예배와 삶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날은 오히려 저주와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1-24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절기나 성회 때 드리는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받지 않겠다고 하시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도 멈추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예배를 통한 인격의 성숙이나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사람들의 탄식과 애통하는 소리가 가득한데 교회 안에는 우리만의 흥겨운 노래가 가득한 이율배반적인 신앙의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우리만의 것이 되지 않고 우리를 통해 이웃이 부르는 찬송이 될 수 있도록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합시다.
내 삶에 흐르는 정의와 공의의 강은 얼마나 실질적인가?
25절
하나님은 마음을 받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사십 년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 드린 예물은 아모스 시대에 드린 예물에 비교할 수 없이 작고 초라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신 예배는 물질이 풍성한 아모스 시대의 예배가 아니라 물질이 없어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풍성하던 광야 교회(행 7:38) 시절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그저 보기에 좋은 화력한 의식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8-23절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적 행위만 열심히 하면 회복과 구원의 여호와의 날을 맞이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삶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채 그럴싸한 예배로만 포장한다면, 여호와의 날은 사자를 피하려다 곰을 만난 것 같은 화와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내 삶이 어떠하든 자동적으로 장밋빛일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그날의 구원은 믿는 자의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증명됩니다.
나는 얼마나 ‘여호와의 날’을 진지하게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는가?
26-27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는 이스라엘의 손에 여전히 앗수르의 우상인 ’식굿’과 ‘기윤‘이 있습니다. 포로로 사로잡혀 가면서도 우상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은 그들이 왜 그러한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이가 없는 상황인데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상은 없습니까?
우상을 품은 손으로 구원을 잡을 수 없다. 내가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우상은 무엇인가?
매일성경 20241112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