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늡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23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리라 하리라 하시니라
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4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5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14,15절, 하나님은 심판으로 녹초가 된 백성을 달래고 어르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거친 들)처럼 황폐해졌지만, 하나님 밖에 의지할 수단이 없는 그 광야가 새 관계의 출발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처음부터,출애굽에서부터 시작하실 것입니다. 광야를 포도원으로, 아골(고통)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내가 쓰러진 그곳에서 다시 시작케 하시는 주님의 다정한 음성이 들리십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다시 부르신다. 그들을 거친 들로 이끄시고 거기서 위로하신다. 거친 들, 즉 광야는 고통의 장소지만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는 자리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분만 의지하도록 광야로 이끄시고, 거기서 다시 소망을 열어 주신다. ‘아골 골짜기’는 죄의 대가로 고통을 겪었던 곳이지만, 하나님은 그 자를 ‘소망의 문‘으로 바꾸신다. 우리가 가장 실패하고 낙심한 그 자리가 하나님과 새롭게 시작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나의 무너진 자리는 하나님의 회복이 시작되는 자리다.
내가 맞닥뜨린 광야, 주님은 이곳에서 내게 새롭게 시작하시길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16,17절, ‘바알‘은 자기 남편을 부르는 말이기도 했는데, 거룩한 신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알’이 아닌 ‘남편으로만 불러야 한다고 하십니다. ‘남편‘이신 하나님을 우상처럼 ’바알‘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의 와 부정이 가져다준 복을 신앙의 수식어로 치장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바알로 부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날에 이스라엘이 다시는 하나님을 ‘바알’이라 부르지 않게 하시고, 오직 ‘남편‘이라 부르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관계로 부르신다. 그분을 마치 종교적 수단처럼, 기복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바알‘이라 부르는 신앙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남편’이라 부르며 진심으로 의지할 때에야 진정한 회복이 시작된다. 신앙은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이다.
나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대하고 있는가,아니면 바알처럼 내 필요를 위한 수단으로 대하고 있는가?
18-20절, 신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자신을 알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안다’는 것은 추상적인 성찰이 아닌, 공의, 정의, 은총, 긍휼, 진실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 현실과 사회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알면, 내 욕망으로 만든 우상은 무너지고 내 야망으로 만든 활과 칼은 꺾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며, 공의와 정의, 은총과 긍휼, 진실함으로 신랑이 되어 주신다. 이것이 참된 관계의 본질이다. 단지 풍요나 안락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본질이다. 세상에서 쌓은 욕망과 힘은 언젠가 무너지고, 오직 주님과의 진실한 관계만이 이를 지탱하게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삶의 기준을 뒤바꾼다.
하나님의 성품인 공의, 정의, 은총, 긍휼, 진실함이 내 삶에서 얼마나 드러나고 있나?
21-23절,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창조질서의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피와 전쟁으로 얼룩진 이스르엘은 그 이름대로 하나님의 씨를 뿌려 풍요를 거두는 곳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많든 적든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께 구하여 받은 것일 때 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자연과 질서도 회복된다. 땅은 응답하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응답하고, 으스르엘이 응답한다. 이는 하나님의 복이 인간의 관계 속뿐 아니라, 창조질서와 물질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던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내 백성이 아니다’하셨던 자를 ‘내 백성이‘이라 부르신다.
하나님의 회복은 관계, 질서, 삶 전반에 깃든다.
하나님의 회복이 나의 삶과 관계, 환경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 그 회복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3:1-5절, 하나님은 신전 창기로 되돌아간 아내를 다시 맞아들이라고 호세아에게 명령하십니다. 값을 지불해서라도 아내의 소유권을 획득하라 하십니다. 호세아와 그 아내가 보낸 숙려기간처럼,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왕도 지도자도, 제사도 없는 암흑기를 거친 후에야 정결해져서 돌아올 것입니다. 고난으로 내 죄와 부족함이 드러나거든 자숙과 성찰의 시간을 자처해서라도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회복합시다.
호세아는 다시 음녀가 된 여인을 찾아간다. 값을 지불해 다시 데려온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그와 같이 다시 사랑하시고 회복하시려 한다. 그러나 그 회복에는 ‘자숙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왕도 없고, 제사도 없는 기간을 통해 바른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니의 초대이다.
회복은 때로 고요한 자숙의 시간 속에 이루어진다.
지금 내가 고난의 시기 속에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그 시간 속에 무엇을 배워야 할까?
매일성경 2024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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