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학적 주제
1)신성한 전사와 언약
이 책에서 두드러진 하나님의 이미지는 전사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관계에 대한 이 은유가 특히 2장에 배에 있지만, 이 책 전반을 흐르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셨고, 그들의 죄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러 오신다.
신명기 27, 28장은 율법에 순종할 때 뒤따르는 일련의 보상을 담고 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군사적 특징을 지닌다. 일례가 28:7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반대로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징벌로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군사적 패배가 포함된다. 신명기 28:25절은 7절의 반대쪽 거울상이다.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아마도 앞으로의 현실을 예상하면서) 불순종에 대한 저주가 순종에 대한 보상보다 훨씬 길게 제시된다. 거기에는 포위 공격과 파괴에 대한 섬뜩한 묘사가 포함된다.
예레미야애가는 언약의 불순종에 대한 응답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본문이다. 하나님은 백성의 죄 때문에 예루살렘을 공격하러 오신다. 사실 예레미야애가 4:10은 신명기 28:53-57에 나온 구체적인 언약의 저주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바벨론의 예루살렘을 격파했을 때 분명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전사로 가장 두렵게 등장하셨다. 예레미야애가 저술 배후에 바로 이 사상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렇기는 하지만 예레미야애가의 정경적 이해는 이 두려운 패배로 인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전사로 개입하시는 이야기가 아주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신약 성경에 비추어 예레미야애가 읽기
앞서 우리는 예레미야애가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적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하나님은 언약의 저주에서 미리 경고하셨듯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반응으로 그들을 공격하러 오셨다. 이 책의 희망의 전조(3:19-27)는 주전 539년의 고레스 칙령 이후 포로들이 그 땅으로 귀환할 때 처음 성취된다. 백성은 그 땅으로 돌아오지만, 그들은 정치적으로 독립되지 않았다. 성전이 재건되었지만, 이전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백성은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주전 5세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사역 기간에 영적, 물리적 진보가 있었다는 보도 이후에도, 에스라-느헤미야 마지막 장은 느헤미야가 언약 공동체 안에서 계속되던 문제를 개탄하는 모습을 그린다.
포로기와 포로 후의 예언자들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신성한 전사를 본다. 그들이 본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적이신 환상이 아니다. 오히려 천사이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려고 미래에 개입하시는 환상이다(단7장; 슥 14장, 말 4장). 신약 성경은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서 악의 세력을 격파하신 신성한 전사로(골 2:13-15), 또 모든 인류와 하나님의 영적인 적에게 맞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기 위해 미래에 다시 오실 분으로(계 19:11-21) 묘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위해 그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적, 사탄과 맞서 싸우시는 신성한 전사다.
3)예레미야애가의 죄책과 고통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 파괴에서 생존했던 이들이 경험한 끔찍한 고통과 고난을 표현한다. 그 어휘는 생생하고 강렬하다. 독자들은 그을린 건물에서 올라오는 연기 냄새를 맡고, 거리에 늘어선 시체를 보며, 그리고 가장 통렬하게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정도다. 시인이 너무 효과적이서 독자들은 거의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고, 민감한 독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만든다. “이 대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최근 해석자들은 백성의 죄와 죄책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해석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하며, 이 책이 하나님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고 주장한다. 예레미야애가의 시인은 하나님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아마 더 나아가 고난이 죄에 합당한 정도를 넘어섰다고 주장하기 위해, 자기 백성의 극한 고난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돌린다. 하지만 그 어조는 비난과 분노가 아니라 질문이다. 여기가 최근의 혁신적 해석이 명백히 잘못된 지점인데, 예레미야애가는 모든 장에서, 또 그모든 ‘음성‘에서 최종 책임이 백성과 그들의 죄에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다.
3장에서 시인은 ‘고난당한 남자’를 통해 말한다. 이 ‘남자’, 유대 공동체를 대표하는 시적 인물은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는 고난을 옹호한다(3:28-30). 또 그는 이 책에 있는 유일하고 분명한 희망의 진술에서 하나님이 지금 자기 백성을 향해 품으신 분노의 태도를 긍정적인 태도로 바꾸실 것이라는 확실한 기대를 옹호한다. 이 ’남자‘가 자신의 곤경을 자신(공동체)의 죄의 결과로 이해한다는 사실은 39절에서 아주 명백하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사람이, 자기 죄 값으로 치르는 벌을 불평하느냐?” 따라서 당연히 이 ’남자‘는 청중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섬으로써 회개하라고 조언한다(3:40-42).
이 책의 시적 음성들은 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끔찍한 곤경이 발생했음을 잘 알고 있다. 시인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다”(1:5b), 또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다”((1:8a)고 명확히 진술한다. 의인화된 예루살렘 자신이 “주님께서 내가 지은 죄를 묶고 얽어서 멍에를 만드셨다”고 선포한다(1:14a, 새번역). 예루살렘은 1:18에서 하나님의 무죄를 주장한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사실 예레미야애가는 또한 백성에게 고난을 가져다 준 인간 대리인 위에 징벌을 내리시도록 요청한다. 그들은 악했고 따라서 마땅히 파괴도어야 하지만, 이것은 1:22에서 다시 처녀 딸 자신이 진술하듯이, 예루살렘 백성의 고난이 부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징벌하기 위해 사용하신 이들에게 합당한 징벌이 임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 모든 것을 인식할때, 시인이 자신들의 현재 겪는 곤경을 언약을 배반한 결과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트렘퍼 롱맨 3세([UBC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매일성경 202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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